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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우 (고려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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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우는 고려 왕족으로, 창원부원대군, 정양군, 정양부원군 등을 거쳐 판문하성사, 영삼사사 등을 역임했다. 공양왕 즉위 후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사대 조상과 외조를 추존하는 일을 도왔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이성계의 사위가 된 딸 덕분에 화를 면하고 마전군, 귀의군에 봉해졌으며, 고려 왕실 선조들의 제사를 맡았다. 1397년에 사망했으며, 두 아들은 왕자의 난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그의 딸들은 조선 태조의 아들들과 혼인하여 조선 왕족의 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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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우 (고려 왕족)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왕우
본명왕우 (王瑀)
다른 이름미상
작위정양군
정양부원군
마전군
귀의군
출생생년 미상
출생지고려 개경
사망일1397년 3월 23일 (음력 2월 24일)
사망지조선 한성부
매장지미상
시호경희 (景禧)
종교불교무종교
가문개성
왕조고려, 조선
가족 관계
배우자교하 노씨
부왕정원부원군
모후국대비 왕씨
자녀정강군 왕조
왕관
딸 3명
관직 및 활동
주요 직위판문하성사 (hangul=판문하성사)
영삼사사 (hangul=영삼사사)
종부시사 (hangul=종부시사)
영문하부사 (hangul=영문하부사)
작위 수여1389년 공양왕에 의해 정양부원군으로 봉해짐.
추가 작위1392년 태조에 의해 마전군 (麻田君) 및 귀의군 (歸義君)으로 봉해짐. 왕씨의 제사를 주관하게 됨. (hangul=마전군), (hangul=귀의군)
기타4친의 제사를 맡음.
기타 정보
사망 시기 (음력)1397년 2월 24일

2. 생애

처음에 창원부원대군이 되었다가 다시 정양군(定陽君)에 개봉되었으며, 1389년 형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진봉되어 정양부원군(定陽府院君)이 되었다.[15] 이후 판문하성사(判門下省事)가 되었으며, 영삼사사(領三司事) 겸 종부시사(宗簿寺事)가 됐다.[15]

공양왕이 즉위하여 우왕·창왕을 낮추어 서인(庶人)으로 삼고, 이림(李琳)·이귀생(李貴生)·유염(柳琰)·최렴(崔濂)·노귀산(盧貴山)·이근(李懃) 등을 유배시킬 때 왕명으로 장단에서 진을 치고 비상사태에 대비하기도 하였다.[15] 1392년 고려 공양왕이 사대 조상과 외증, 외고조를 추존하고 그 제사를 맡겼으며, 1391년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에 임명됐다.[15]

1392년 7월 이성계조선을 건국하였으나 그의 딸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하였으므로 화를 면하였고, 마전군(麻田君)·귀의군(歸義君)에 봉해졌으며, 다른 왕족들과 달리 섬으로 보내지지 않고 고려 왕실 선조들의 제사를 맡게 하였다.[15] 이성계는 이를 두고, 친인척 관계라서가 아니라 주나라 때에 멸망한 상나라의 왕자를 송왕(제후)으로 세웠던 것처럼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15]

1392년 12월 두 아들인 왕조(王珇), 왕관(王琯)의 성씨를 외가의 성인 노(盧)씨로 환성하여, 노조(盧珇)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노관(盧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15]

1397년 3월 23일 왕우가 사망하였다.[15] 그리고 10월에 장남 노조(盧珇)를 왕씨로 복성시켜, 아버지 왕우의 작위인 마전군(麻田郡), 귀의군(歸義君) 작위를 습봉하게 하고, 왕씨 가문의 제사를 이어서 지낼 수 있게 하였다.[15]

1398년 8월 26일 두 아들 왕조(王珇)와 왕관(王琯)이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에 휩쓸려 죽임을 당하였다.[15] 때문에 고려 왕실의 씨족인 왕씨 집안의 제사는 여기에서 잠시 끊기게 되었다가, 조선 왕조가 안정된 이후 문종 때에 가서야 왕순례(王循禮)를 통해 재개된다.[15]

2. 1. 고려 왕족 시절

처음에 창원부원대군이 되었다가 다시 정양군(定陽君)에 개봉되었으며, 1389년 형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진봉되어 정양부원군(定陽府院君)이 되었다.[15] 이후 판문하성사(判門下省事)가 되었으며, 영삼사사(領三司事) 겸 종부시사(宗簿寺事)가 됐다.[15]

공양왕이 즉위하여 우왕·창왕을 낮추어 서인(庶人)으로 삼고, 이림(李琳)·이귀생(李貴生)·유염(柳琰)·최렴(崔濂)·노귀산(盧貴山)·이근(李懃) 등을 유배시킬 때 왕명으로 장단에서 진을 치고 비상사태에 대비하기도 하였다.[15] 1392년 고려 공양왕이 사대 조상과 외증, 외고조를 추존하고 그 제사를 맡겼으며, 1391년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에 임명됐다.[15]

2. 2. 조선 건국 이후

1389년 형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진봉되어 정양부원군(定陽府院君)이 되었다. 이후 판문하성사(判門下省事)가 되었으며, 영삼사사(領三司事) 겸 종부시사(宗簿寺事)가 됐다.[15] 공양왕이 즉위하여 우왕·창왕을 낮추어 서인(庶人)으로 삼고, 이림(李琳)·이귀생(李貴生)·유염(柳琰)·최렴(崔濂)·노귀산(盧貴山)·이근(李懃) 등을 유배시킬 때 왕명으로 장단에서 진을 치고 비상사태에 대비하기도 하였다.[15] 1391년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에 임명됐다.[15] 1392년 고려 공양왕이 사대 조상과 외증, 외고조를 추존하고 그 제사를 맡겼다.[15]

1392년 7월 이성계조선을 건국하였으나 그의 딸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하였으므로 화를 면하였고, 마전군(麻田君)·귀의군(歸義君)에 봉해졌으며, 다른 왕족들과 달리 섬으로 보내지지 않고 고려 왕실 선조들의 제사를 맡게 하였다.[15] 이성계는 이를 두고, 친인척 관계라서가 아니라 주나라 때에 멸망한 상나라의 왕자를 송왕(제후)으로 세웠던 것처럼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15]

1392년 12월 두 아들인 왕조(王珇), 왕관(王琯)의 성씨를 외가의 성인 노(盧)씨로 환성하여, 노조(盧珇)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노관(盧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15]

1397년 3월 23일 왕우가 사망하였다.[15] 그리고 10월에 장남 노조(盧珇)를 왕씨로 복성시켜, 아버지 왕우의 작위인 마전군(麻田郡), 귀의군(歸義君) 작위를 습봉하게 하고, 왕씨 가문의 제사를 이어서 지낼 수 있게 하였다.[15]

1398년 8월 26일 두 아들 왕조(王珇)와 왕관(王琯)이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에 휩쓸려 죽임을 당하였다.[15] 때문에 고려 왕실의 씨족인 왕씨 집안의 제사는 여기에서 잠시 끊기게 되었다가, 조선 왕조가 안정된 이후 문종 때에 가서야 왕순례(王循禮)를 통해 재개된다.[15]

2. 3. 몰락

1392년 7월 이성계조선을 건국하였으나 그의 딸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하였으므로 화를 면하였고, 마전군(麻田君)·귀의군(歸義君)에 봉해졌으며, 다른 왕족들과 달리 섬으로 보내지지 않고 고려 왕실 선조들의 제사를 맡게 하였다.[15] 이성계는 이를 두고, 친인척 관계라서가 아니라 주나라 때에 멸망한 상나라의 왕자를 송왕(제후)으로 세웠던 것처럼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15]

1392년 12월 두 아들인 왕조(王珇), 왕관(王琯)의 성씨를 외가의 성인 노(盧)씨로 환성하여, 노조(盧珇)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노관(盧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15]

1397년 3월 23일 왕우가 사망하였다.[15] 그리고 10월에 장남 노조(盧珇)를 왕씨로 복성시켜, 아버지 왕우의 작위인 마전군(麻田郡), 귀의군(歸義君) 작위를 습봉하게 하고, 왕씨 가문의 제사를 이어서 지낼 수 있게 하였다.[15]

1398년 8월 26일 두 아들 왕조(王珇)와 왕관(王琯)이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에 휩쓸려 죽임을 당하였다.[15] 때문에 고려 왕실의 씨족인 왕씨 집안의 제사는 여기에서 잠시 끊기게 되었다가, 조선 왕조가 안정된 이후 문종 때에 가서야 왕순례(王循禮)를 통해 재개된다.[15]

3. 가족 관계

4. 기타

그의 딸들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 무안대군 이방번, 진안대군 이방우의 서자 순녕군 이덕근과 결혼하였으므로, 그는 조선의 왕족도 된다.

5. 평가

참조

[1] 웹사이트 왕요를 공양군으로, 왕우를 귀의군으로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다 http://sillok.histor[...] 2021-11-22
[2] 웹사이트 공양왕이 서원군 왕영 이하 4대의 신주를 봉안한 적경원 등을 설치하다 http://db.history.go[...] 2021-11-22
[3] 웹사이트 왕우의 군사를 장단현에 주둔시키다 http://db.history.go[...] 2021-11-22
[4] 웹사이트 정양부원군 왕우가 4친의 제사를 맡다 http://db.history.go[...] 2021-11-22
[5] 웹사이트 연천 숭의전지 (漣川 崇義殿址) http://www.heritage.[...]
[5] 웹사이트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는 조선전기 고려 태조 등을 제향하던 사당터 http://encykorea.aks[...]
[5] 웹사이트 연천 숭의전지 https://gjicp.ggcf.k[...]
[6] 웹사이트 대사헌 민개 등이 고려 왕조의 왕씨들을 지방으로 보내자고 청하다 http://sillok.histor[...] 2021-11-22
[7] 웹사이트 왕우와 함께 격구하면서 공양왕에 대하여 말하다 http://sillok.histor[...] 2021-11-22
[8] 웹사이트 귀의군 왕우의 졸기. 예장하고 시호를 내리다 http://sillok.histor[...] 2021-11-22
[9] 서적 고려사 - 열정과 자존의 오백년 https://books.google[...] 들녘 2014-05-28
[10] 서적 역동적 고려사 https://books.google[...] 필맥 2012-06-06
[11] 문서 음력 2월 24일
[12] 웹인용 태조실록11권,태조6년(1397년)2월 24일 http://sillok.histor[...]
[13] 문서 신종 - 양양공 서 - 시안공 인 - 서원후 영 - 익양공 분 - 순화후 유 - 정원부원군 균 - 정양부원군 우
[14] 문서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소생 무안대군 방번이 그의 사위였다.
[15] 문서 태조실록 太祖 元年 12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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